[개념] 차연

 

 차연 개념은 후기 구조주의 시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데리다가 ‘차이+연기’라는 말을 합쳐 차연(differ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요.

 레비 스트라우스로 대표되는 언어구조학자가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서 기표의 절대성을 믿은 반면(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구조주의의 기본 생각은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와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레비 스트라우스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이 둘이 바뀔 가능성은 극히 소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한 단어는 그 단어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존재하는 사회, 다른 언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 하나의 기표와 기의가 바뀌면 다른 기호체계도 바뀐다고 여겼습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는 불안전하고 무질서한 체계로 봅니다. 기표와 기의, 이 둘 관계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찰나적이며, 일시적이며, 우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 접합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고양이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단순히 고양이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양이처럼 매력적인 여성이나 혹은 고양이가 주는 공포 등을 지칭하기도 하지요. 또한 우리가 국가라고 말하여도 플라톤의 ‘국가’와 현대 사람들의 ‘국가’는 의미가 다르지요.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구조의 개념을 부정합니다. 즉 랑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부유하는 기표들 뿐입니다. 기표는 다른 기표들의 연쇄에 의해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시계’라는 기표의 의미를 가져다보는 것은 ‘시간’ ‘알려주다’ ‘기계’ ‘장치’라는 기표의 연쇄 작용입니다.

 그런 후기 구조주의자 중에 데리다가 있습니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 앞서 말한 듯이 차이(different)와 연기(deferment)의 결합입니다.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닌 이 단어는 두 의미(차연과 연기)의 의미를 모두 작동시키며, 어느 순간에도 한쪽의 의미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하나의 대체 가능한 언어해석으로 다른 해석으로 지연된다는 것이 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데리다의 차연 개념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이 것은 이전의 단어의 일대일 대응 프레임의 부정입니다. 절대적 법칙의 부정입니다. 한 단어는 하나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수많은 해석과 이해 가능성이 열립니다. 또한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현재 지닌 관점과 미래에 지닐 관점이 상이하게 다를 수 있으므로 대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불평등 자체가 사회가 유지되는 필수조건이라고 보았던 데이비스와 무어에 비해서, 우리는 그저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파슨즈에 비해서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 관대한가요. 사회를 해석하는 프레임은 여러 가지가 있고 어느 프레임 역시 사회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좋아한다고 해서 구조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알게 된 순간, 무언가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해요.

 아, 참고로 눈의 역사와 눈의 개념에서 놀이와 ‘차연’을 연결시킨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제시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리다가 ‘차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하기 이전에는 ‘놀이’가 차연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집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개념이자, 알아두시면 좋을 내용이라 이렇게 올려둡니다.

by 케키야상 | 2009/08/24 16:52 | 공유하고 싶은 마음 | 트랙백 | 덧글(0)
[작문] 질투

 정말 아쉽게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옳은 말, 선한 일을 하였다고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만 보이지는 않는다.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이가 있는가하면 “꼴값 떠네”, “착한 적 한다”라는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런 비난의 감정 밑바닥에는 ‘당신이 한 일은 위선에 불과하오’라는 조롱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사람 감정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지라 똑같이 ‘꼴값 떠네’를 외쳐도 그 밑바닥에 담긴 감정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처음 문근영 씨가 거액의 돈을 도서관을 위해 기부하였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참 대단하다’와 ‘쳇, 돈을 얼마나 벌기에 그런 거액을 척척 내놓는 것이람’이라는 정반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부러웠고 질투하였다. 기사의 댓글을 클릭해보니 ‘역시 국민여동생, 하는 행동이 다르네’라는 베스트 댓글에 찬성과 반대가 엇비슷할 정도로 달려있는지라 ‘아, 이 복잡한 마음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구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사람들과 다툴 때, 들으면 제일 화가 나는 말이 ‘옳은 말’이듯이 나는 문근영 씨의 선행이 내가 갖추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에 대한 강한 질투가 솔직히 그녀의 선행을 친찬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가 그 사람의 선행에 대해 칭찬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는 그 사람의 선행이 더할 나위 없는 뻔뻔스러움으로 느껴지면서, 뱃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밀려 올려오면 온몸의 기를 모아 ‘꼴값 떠네’를 외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 나들이를 하시는 몇몇 분들과 민생과 의료민영화를 동시에 외치는 얄미운 입들에게 집중적으로 이런 기분을 맛볼 때가 잦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도덕철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학문이다. 도덕이란 절대적인 신이 내린 가르침이라는 의견도 있고, 홉스의 사회계약설처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동의한 무엇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덕적인 일을 하는 것은 그 도덕적 일을 함으로써 기쁨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라는 ‘도덕적 이기주의’ 역시 흥미로운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철학적 논쟁에 앞서 놀랍도록 잘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날카롭게 간파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by 케키야상 | 2009/08/15 17:23 | 공유하고 싶은 마음 | 트랙백 | 덧글(0)
오타쿠의 독백

내 자신을 오타쿠라고 지칭하는 것은, 내가 2차원 세계의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3차원)에도 멋있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의 매력 역시 2차원의 그들에 뒤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원 세계의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 역시 있다.현실에는 없는 이들. 인간의 상상과 욕망이 빚어낸 창작물. 그러나 아름답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들만 모아서 빚어낸 듯한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그러나, 아쉽게도 2차원 세계의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짝사랑이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 언제나 훔쳐보는 나는 방관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나의 기쁨은, 나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의 곁을 맴돌 뿐이다.
피규어를 사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을까?
ost를 사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을까?
포스터를 사면?
묘한 이성은 이럴 때만 자신을 지켜 그래보았자, 상업주의의 놀이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들을 만들어내면, 될까?
솔직히 시도는 해보았지만, 상상의 즐거움은 있었을 망정 인형놀이의 기분은 지우지 못하였다.(그리고 나는 인형놀이를 싫어한다;;)

결국 나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기쁨이 되는 것은, 내가 이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이 감정이 언제나 나를 환희에 휩싸이게 한다.

by 케키야상 | 2009/08/03 23:37 | 38.7º | 트랙백 | 덧글(0)
[작문] 손
오늘 추격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디보자, 작년 개봉된 영화이네요.
그 때 저는 일본에 있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한바탕 떠들썩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면서 무서웠던 것은 물론 지영민이 여성들을 죽일 때도 물론 그러하였습니다만,
자기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하여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지영민의 집을 찾았다면,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분명 그녀는 살아남았고 무고한 희생자는 줄어들었겠지요.
가장 연약한 그녀들을 제외한 이들, 심지어 엄준호조차도 가해자였기에 그 애처로움은 더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수사는 어이없을 정도로 체면치레와 무지함으로 가득차 있어, 설마 저렇게 경찰들이 무능할까(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섭습니다만..) 생각하였지만 영화의 극적 부분을 제외하고서로 날카로운 비판이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라 무섭게, 그리고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죽이는 손, 살기 위해 발악하는 손, 때리는 손...손손손... 


이어지는 내용
by 케키야상 | 2009/08/03 01:01 | 공유하고 싶은 마음 | 덧글(0)
[작문] 고양이

 70년대 중반까지 스웨덴에서는 40여 년간 우생학 이론에 따라 열등 유전자를 근절하기 위해서 강제 불임 수술을 시술하였다. 그 대상이 된 것은 미혼모, 집시, 부랑아, 정신병자, 상습 범죄자, 정신 지체나 약시(弱視)였다. 복지선진국가라고 여겨지는 스웨덴에서 일어난 이 비극에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잔혹성에 경악하는 동시에 이성의 차가움에 전율하였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이러한 만행은 반복되고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 서울에서이다. 다만 그 대상이 인간에서 고양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해 3월부터 실시된 TNR은 길고양이들을 포획해 중성화수술을 시킨 후, 다시 본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기존의 살처분방식이 오히려 진공효과(빈 영역에 다른 길고양이들이 들어오거나 암컷이 새끼를 빨리 배 길고양이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도입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쓰레기봉투를 헤집어놓거나 밤마다 아기울음소리의 발정기음은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에 대해 반감을 품게 만들었다. 길고양이에게도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너무 개체 수가 증가하면 길고양이사이의 영역다툼이 치열해질 뿐만이 아니라 살처분방식에 비하여 훨씬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언론은 이 프로그램이 길고양이와 사람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평한다. 이런 호의적인 반응에 힘입어 올해 부산에서도 TNR프로그램의 시범실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호가 오히려 나에게는 불안하게 보이기만 한다. 이러한 환호에는 어떠한 고민과 반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잔혹한 이기심과 이성의 차가운 메스가 번뜩일 뿐이다. 애당초 길고양이는 주택가를 배회하며 음식쓰레기를 ‘도둑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 것들만이 그들에게 그나마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평의 땅도, 나무 한 그루도 주인이 매겨진 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은 주택가의 보일러실에서 한 줌의 온기를 얻고,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로 연명을 이어나간다. 인간들과 그들이 선택한 애완동물만이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을 허락받은 이 사회에서 그들은 도시의 ‘빈민’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길고양이들이 고작 음식쓰레기를 탐내며 보일러실에 자리 잡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이들을 떠올린다. 대형마트 때문에 동네 슈퍼마켓이 죽는다고 사정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규제는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이를, 200만원 남짓의 보상금을 주고는 집에서 못나가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을.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불임수술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어조와 대형마트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라는 그의 말, 200만원이라도 감지덕지하게 받고 나가라는 그들의 조소는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

 

 결국 ‘인간과 길고양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TNR프로그램은 길고양이에 대한 기만,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 평화로움은 어디까지나 강자, 인간의 잣대로 재단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문 앞에 뜯어져 더럽혀져 있는 쓰레기 봉지를 보며 분노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비극을.

by 케키야상 | 2009/07/22 20:29 | 공유하고 싶은 마음 | 트랙백 | 덧글(0)